아버지와 아들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다. 톨게이트에서는 라디오를 통해서 지금 이들이 가는 곳의 상황이 흘러나온다. ‘영화감독’(파하드 케라만드)인 아버지와 아들 ‘푸야’(부바 바이요)는 대지진이라는 비극이 훑고 지나간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지진 피해 지역에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어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아이들이 있는 ‘코케 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톨게이트에 들어서면서 시작되는 그들의 여정도 땅에 내려진 절망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감독이 코케로 가는 길을 물을 때마다 사람들은 ‘길이 막혀있을 것이다.’ ‘차로는 갈 수 없다.’ 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감독은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재난의 현장으로 진입한다. 울퉁불퉁하고 좁은 비포장도로를 통해서. 그리고 계속해서 더 좁지만, 코케로 향해 있는 길을 따라 간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풍경은 고속도로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고속도로에서는 사방이 차로 막혀 오갈 곳 없이 꽉 찬 차의 내부 화면만을 보여줬다면, 코케를 향하는 좁은 길에 들어서면서는 전원의 풍경으로 화면의 시야가 트인다. 그리고 긴박하고 소란스러웠던 외부와는 다르게 폐허 속의 내부의 삶은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지진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풍경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고’ 있었다. 감독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는 지진으로 인한 상실들을 안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여럿 잃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떠난 사이에 마을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폐허 속에서도 부단히 움직여 삶을 건져낸다.
감독이 만난 한 청년은 지진이 있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다. 삶이라는 것이 외부의 힘에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목격한 청년과 그의 아내는 결혼을 위한 절차나 지금 이 땅에 내려진 비극도 삶을 가진 자신들의 행복을 미룰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즐기자’는 마음으로 행복을 빠르게 그들 곁에 두었다.
한편, 감독은 코케로 가는 길목에서 영화에 출연했던 단역 아이를 만난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들고 길을 걷고 있는 아이를 태워 아이의 가족이 살고 있는 텐트로 데려다 주기로 한다. 또래 친구를 만난 아들 푸야는 방금 만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핫이슈는 바로 그 해 열린 월드컵이다. 신나게 조잘거리던 아이들은 어느 나라가 우승할 지를 놓고서 내기를 건다. 이때 불쑥 지진의 상흔이 드러난다.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이가 내기에 걸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으며, 푸야에게는 아이가 제시하는 물건들이 모두 시시하게만 느껴진다. 천진한 아이들의 대화는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지진에 무너진 폐허나, 거대하게 갈라진 땅보다 더 날카롭게 안과 밖을 나눈다. 그리고 지진의 현장 속에 들어와 그들이 증명하는 삶의 희망으로 인해 느슨해졌던 재난이라는 절망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하지만 그 감각은 아이가 사는 천막촌에 도착하면서 조금 느슨해진다. 천막촌 사람들은 먼 능선 위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바로 오늘 열릴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축구경기를 보겠다는 아들을 내려놓고 감독은 이제 한 시간 남짓 남은 길을 나선다. 그 길목에서 아까 능선 위에서 안테나를 올리던 청년을 만난다. 감독은 그에게 묻는다.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 왜 축구 경기를 보려”하는지. 그러자 청년이 말한다. “저도 여동생과 조카 셋을 잃었어요. 그렇지만 어찌합니까? 월드컵은 4년마다 열리고,” 그 뒤를 감독이 이어 말한다. “지진은 40년 이죠. 그리고 삶은 계속되죠.”라고. 영화의 제목으로 뽑힌 이 대화는 절망과 희망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절망은 ‘순간’의 일이고 희망은 ‘지속’되는 것이라고. 절망 이후에 벌어지는 삶의 축제들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절망의 영역은 삶 안에서 계속해서 줄어들어 결국 하나의 점이 될 것이다. 그러면 계속되었던 삶은 결국 희망의 차지가 된다.
감독도 희망을 품고 먼 길을 왔다. 함께 영화를 찍었던 아이들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희망이 그를 결국 목적지 앞까지 데려왔다. 아이들이 있는 코케 마을을 가려면 이제 언덕 하나만 넘으면 된다. 가파르고 길게 나있는 지그재그의 길. 사람들은 힘이 센 자동차라면 모를까 감독이 타고 있는 세월을 탄 승용차로는 넘어갈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감독은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 달려온 이 차를 가지고 언덕을 넘어가기 보기로 한다.
하지만 역시 자동차는 지그재그 길을 넘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거꾸로 내려오게 된다. 차에서 내려 산등성이를 바라본 감독에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찾고 있던 아이들이라고 생각되는 실루엣이다. 감독은 차를 타고 다시 길을 돌아가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그리고는 희망찬 음악과 함께 화면 끝에서 다시 차가 길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길 중간에 있던 사람을 태우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길을 따라 화면 위로 사라진다.
자동차가 길에서 거꾸로 내려온 일은 감독의 여정에 있어서는 절망에 해당한다. 지금껏 좁고 힘든 길이라도 계속해서 달려올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의 순간에 그가 바라본 곳은 다시 굴러 내려온 자동차나, 바로 앞에 펼쳐진 오르막길이 아니었다. 그는 길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언덕의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가고자 하는 길을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그렇게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던 아이들의 실루엣이었다. 그렇기에 감독은 그 길을 다시 한 번 오를 수 있었다. 다시 지그재그 길을 올라가는 그의 자동차에는 희망이라는 동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이다. 이것은 ‘그리고’ 앞에 어떤 단어가 붙든, ‘삶은 계속된다’는 뜻이다. 영화가 ‘그리고’ 앞에 제시하는 상황은 지진이라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거대한 비극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이 주어져도 살아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 영화는 죽지 않는 한 계속될 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제시한다. 하나는 ‘행복’이며 다른 하나는 ‘희망’이다. ‘행복’은 바로 눈에 보이고 손이 닿는 바로 곁에 존재하며, ‘희망’은 조금은 멀리, 마치 가파른 지그재그 길의 끝 정도쯤에 존재한다. 그래야 우리는 절망이 곳곳에 숨어있는 삶의 여정에서도 순간순간 행복을 느낄 수 있고, 한 걸음 앞에 있는 희망을 바라보면서 삶을 계속해서 걸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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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URL: (https://www.themoviedb.org/movie/83761-zendegi-va-digar-hich?language=en-US)
별점: (AAA)
지금 이순간은 삶의 작은 한 부분이라 크게 보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인 것 같아요.
하지만 힘들어서 인지를 못하죠.
올해는 좀 더 멀리 봐야 겠습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저도 이 영화 덕분에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한 해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