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 씨가 말한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 조회해 봤어요. 생각보다 거주불명자가 많더군요.”
혜원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있고 난 며칠 후였다. 그녀는 수사 협조 차원에서 경찰청에 출두해 줄 것을 부탁했다. 공손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힘 실린 목소리였다.
경찰청 앞 횡단보도에서 신일은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태웠다. 공권력의 권위를 상징하듯 경찰청 건물의 위용은 드높았고, 혓바닥의 니코틴은 떫은 향에 춤을 췄다.
신일이 혜원의 요청에 적극협조하기로 마음먹은 건, 요 며칠 새 그의 귓가에 강렬한 외침이 울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살인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 울림은 어설픈 정의감이나 서투른 호기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공포, 다음 희생자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공포에 가까웠다.
“진하는 어떻습니까?”
“음, 역시 예상하신대로, 라고 해야 할까요. 작년 말부터 행적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혜원의 태도가 눈에 띠게 사무적으로 바뀌었다. 싸늘해진 말투에 신일은 움츠린 어깨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긴장감을 감추지 못해 쭈뼛대는 참고인에게 혜원은 심문하듯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 마진하라는 사람, 어려서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다죠?”
많은 이들이 진하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진하의 불우한 환경 탓이 컸다. 동정심의 발로였다 한들, 가장 어두운 곳에서 환하게 빛나는 그의 당당함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예, 집안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던 걸로 기억해요. 어머니도 몸이 많이 편찮으셨던 걸로 알고 있고….”
“그 마진하의 모친,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예?”
그분이, 돌아가신 건가. 입천장에 들러붙은 떫은 니코틴 향이 밀려온다.
진하가 휴가에서 복귀하는 날이면, 그녀는 늘 아들의 귀대 소식을 전할 겸 신일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부족한 아들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덤덤하지만, 이마에 새겨진 주름자국을 선명히 읽어낼 수 있는 말투였다.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던 그 소박한 울먹임. 그 분이, 돌아가신 건가.
“…그렇군요.”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녀는 진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지켜내고자 했던 혈육. 마지막 행복의 조각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 신일 씨.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시겠어요? 신일 씨가 저번에 말씀하셨던…”
혜원은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목에 힘을 줘 말했다.
“범인이 전술학 조교 중에 있을 거라는 얘기 말씀이시죠?”
“예, 어떻게 그걸 확신한 거죠? 일단 저희로서도 신일 씨가 말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추려 보긴 했는데, 그 중에 범인이 있을 거라 확신하게 된 근거가 뭔지…”
“지난 번 편지의 도입부 말이에요.”
의자에서 등을 떼며 마침내 신일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대사라는…”
“예. 바로 그 대목이요.”
“거기 담긴 숨은 의미를 알아차리신 건가요?”
“아마도요. 그 날 혜원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든 생각이에요. 이전에 보인 범인의 성향을 토대로 메시지의 의도를 재해석한 거죠.”
“범인의 성향?”
“범인은 한 대령 사건 때에도 살인을 저지른 후 의도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죠. 그 이상한 메시지라든지….”
“마피아, 라는 단어라든지요…”
“그래요. 그렇다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뭘까요? 뜻도 알 수 없는 그런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남긴 이유 말이에요.”
“그야…”
“범인은 우리를 상대로 게임을 하고 싶은 거예요.”
“게임?”
“이놈은 아마 자기 잘난 걸 사방에 떠들길 좋아하는 떠버리일 거예요. 자기가 일반적인 사람보다 우월하고, 남들과 다른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 자기가 아는 얄팍한 지식을 어떻게든 떠들고 싶어 안달이 난….”
“…과시욕 넘치는 사이코패스요.”
“그렇죠. 만약 범인이 그런 성향이라면, 아마 지금쯤 엄청나게 기고만장해 있겠죠.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이만큼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견하겠어요?”
“그럴 수 있어요. 이런 부류의 범죄자는 특히 자의식 과잉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놈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은 뭘까요?”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포상이라면?”
“아마도,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널리 알리는 거 아닐까요? 잘은 몰라도 이놈, 지금쯤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일 걸요? 자신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뉴스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길 은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밝힐 순 없어요. 그러다 경찰에 덜미를 잡히면, 게임은 끝나니까요. 결국 내면에 충돌하는 이 두 가지 욕망,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잡히지 않는 방법은…”
“방법은?”
“수수께끼를 내는 거 아닐까요?”
“…수수께끼?”
“예, 수수께끼로 상대를 농락하며 쾌감을 느끼는 범인의 모습, 상상되지 않아요?”
“글쎄요, 그런 거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전 도무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인(sign) 같은 거라면 어때요?”
“흠, 그 정도라면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있을지…”
“다시 범인이 류 대위에게 남겼다는 그 편지 도입부로 돌아가 보면요. 역시 그 편지의 도입부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려는 장치였을 거예요. 그 대사야말로 사람들이 작품에서 가장 흔하게 떠올리는 대사니까. 애처로운 연인의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니 만큼 수사기관을 속이기도 좋은 대목이었겠죠.”
“실제로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 메시지는 처음부터 류 대위에게 닥칠 필연적인 죽음을 암시한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면?”
“포네틱 코드.”
“예?”
“포네틱 코드요.”
“포네틱 코드라면….”
“한 대령과 류 대위가 같은 부대에 있을 당시, 훈련 조교들이 포네틱 코드로 만든 암호를 썼다고 들었어요. 간부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포네틱 코드로 전환해 콜사인으로 쓴 거죠.”
“그럼….”
“류(Ryu)의 R은 「로미오」(Romeo), 준(Joon)의 J는 「줄리엣」(Juliet)이에요. 그의 죽음을 암시하기 위해 굳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건 이 때문이에요. 누군가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바꿔 부르는 게 흔한 경우는 아니니까.”
“답을 알려 줘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바로 그거에요. 과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까지 알고 있지 않는 한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범인은 바로 그걸 파고 든 거라고요.”
정점을 박차고 꿈틀대는 거대한 바위가 그려진다. 비탈길 위에서 구르는 묵직한 동세(動勢)가 신일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신일은 눈앞에 그려지는 흉흉한 영상을 지우려 고개를 돌렸다.
“당시 같이 근무하던 녀석에게 내용을 확인하느라 그날은 말을 아꼈던 거예요. 엊그제 통화하니 류 대위의 콜사인, 틀림없이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의미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건 범인의 패턴이에요. 살인 동기를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암시하면서 그 속에 상대가 미처 생각지 못한 수수께끼를 숨겨놓는 것 말이에요.”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렇게 활용한 거라면, 확실히 신일 씨가 말한 사람 중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마진하라는 사람을… 포함해서 말이에요.”
신일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함께 생활하고, 웃고 떠들던 대원중 바로 동료를 무참히 살해하고 능욕한 악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