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이 끝나가나 보다. 오후가 되도 날선 바람이 잦아들 줄 모른다.
신일은 낡은 트위드 재킷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하늘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파란데, 머리는 거대한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결국 세 사람이 죽어나갈 동안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신일은 묽은 침 한 모금을 삼켰다. 현재로서는 다음 타겟이 내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몸이 으슬거린다. 이 오한은 갑작스런 늦가을의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게다. 그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싸구려 라이터는 하릴없이 헛바퀴를 돌며 쳇쳇, 불똥만 튀겼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신일은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집어던졌다. 퍽, 소박한 폭발음과 함께 라이터가 아스팔트에 산산조각 난다.
제길, 신일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그건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발악이었다.
정말 이 모든 건 진하의 소행인가? 일련의 범행들은 그의 짓이라기엔 너무 음습한 냄새가 난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눅눅한 공포, 이런 건 녀석과 어울리지 않아. 지난 몇 년 사이 대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피터 부스(Peter Booth), 악마와 웃는 남자(Devil and laughing man), 1981
아니야.
찬찬히 숨을 고르며 신일은 눈을 감았다. 벌써부터 진하를 범인이라고 단정 지어선 안 된다. 수사관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를 범인으로 볼 확증은 없다고. 나부터 이렇게 생각을 닫아버리면, 지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한순간 현실로 일어나 버릴 거다. 원점에서 추론해보자.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무언지, 미처 생각지 못한 건 또 무언지….
“먼저 와 계셨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본 곳, 한 사내가 번쩍이는 황금색 뒤퐁 라이터를 건네고 섰다. 말쑥한 정장 차림에 올리브색 넥타이를 매고, 머리는 왁스로 단정히 정리한 모습이다.
“수강아.”
혜원이 말한 참고인이라는 게, 이 녀석이었나.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어젯밤에 연락 받았어요. 형도 도 중사님 얘기 들으셨어요?”
신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서도 수강은 어두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 그래. 나도 방금 들었어.”
“저도 그 얘기 듣는데 소름이 쫙 돋더라고요. 후우, 그런 얘기 듣고 나니 이게 진짜 남 얘기 같지도 않고….”
수강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댕긴다. 매서워진 바람 때문일까. 담배 심지가 평소보다 빨리 타들어가고 있다.
“형, 엊그제 군에 있을 당시 류 대위의 별명 물어본 것도 이번 사건이랑 상관있는 거죠?”
“으…응”
“역시 그랬구나.”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두 사람은 멍하니 바닥만 내려 볼 뿐, 말이 없었다. 그들이 내뿜는 연기 속, 한숨인지 날숨인지 모를 답답함이 묻어난다. 신일은 먼저 태운 담배를 비벼 끄며 수강을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담뱃불을 튕기는 수강은 전에 본 적 없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그냥 도 중사님 얘기까지 듣고 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뭔가 제가 도울 만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하아, 몇 달 만의 연차를 이렇게 쓸 될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군, 녀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협조할 줄이야. 자기 이익과 직접 연관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타입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녀석이 그 날 했던 말 때문일까. 신일은 퍼뜩 며칠 전의 술자리를 기억해냈다.
그러니까 이건 죄책감 같은 거다. 죽어 마땅하다고 성토하던 인간이 정말 죽어버렸을 때의 황망함. 그러고 보니 수강이 도살자를 도중사님, 이라고 깍듯이 부르는 건 제대 이후 처음이다.
“그래, 잘 왔다.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는 도움이 되겠지. 슬슬 들어가자. 그리고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와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형이 고마워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제가,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수강은 말끝을 흐리며 담배꽁초를 움켜쥐었다.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재떨이에 꽁초를 던져 넣는 그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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