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이야기입니다. 산업은 돈을 먹고 자랍니다. 때론 과식하기도 하고, 때론 굶어 죽기도 합니다. 돈은 영양제로써의 역할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합니다. 돈은 다 같은 돈이지만, 산업과 시기, 기르고 누구의 돈인지에 따라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이번 이야기는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짧게 몇 가지 엮었습니다. 전 세계의 투자기관에 대해서 쓰는 것은 저에게 역부족이니, 국내의 현황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1. 차익거래(Arbitrage)
암호화폐 차익거래는 거래소가 만들어진 이후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몇 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각국 간 가격차이, 거래소 간 가격차이, 24시간 거래, 빈번한 암호화폐 상장 이벤트 등은 매일 차익거래의 기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김치 프리미엄’은 이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작년 말과 올해 초 우리나라 내 암호화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가 간 가격차이가 발생한 것입니다. 여러 차익거래 플레이어가 이 시기에 10%에서 30%에 달하는 차익거래 수익을 실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저 수익은 일 단위이며, 가히 기존 금융시장에선 달성하기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투자자가 글로벌 거래소를 이용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각국의 여러 거래소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연결되면서 차익거래 수익률은 급감했습니다. 그럼에도 일 수익률은 1% 안팎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차익거래의 수익이 거래량과 차액의 곱으로 계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의 급감한 거래량으로 인해 절대수익은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차익거래 시장에서의 이슈는 국가 간 거래입니다. 국내의 거래소와 해외의 거래소 간 차익거래를 진행할 경우, 암호화폐나 명목화폐(Fiat money)가 국경을 넘어 다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부 차익거래 플레이어는 암호화폐는 자산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플레이어는 암호화폐라고 하더라도 명백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에 공감합니다) 이러한 점은 차익거래 플레이어가 향후 제도권 진입을 시도할 때 금융당국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차익거래 플레이어들은 그동안 쌓은 자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MB)을 찾고 있습니다. 크립토 펀드, 헷지펀드, 혹은 아예 새로운 모델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2. 크립토펀드(Crypto Fund)
크립토펀드는 그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투자기업입니다. 아직 정확한 구분이 되기도 쉽지 않죠. 암호화폐에만 투자하는 펀드도 있으며, 블록체인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크립토펀드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해시드, 디블록, 그리고 일부 벤처캐피털이 토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벤처캐피털이 이 업계에 발을 딛긴 힘든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벤처캐피털은 국내 기관투자자(모태펀드, 한국성장금융운용 등)로부터 자금을 받아 운영하는 형태이며, 이에 따라 이들 기관투자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벤처캐피털 관련 법에 따르면, 벤처캐피털은 주식의 형태에만 투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크립토펀드는 실제 기존 벤처캐피털이나 사모펀드와 다른 돌연변이는 아닙니다. 새로운 투자 대상에 새로운 가치 평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행보는 주목을 받는데, 아직 누구도 걷지 않을 길에 뛰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며, 이들 중 일부는 초기 투자 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의 대표 VC인 Andreessen Horowitz는 3억 달러 규모의 크립토펀드를 올해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Andreessen Horowitz의 크립토펀드 ‘a16z cryto fund’의 내용을 간략히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이 있는 장기 투자자다. 5년 이상에 걸쳐 투자를 집행하고, 10년 이상 투자를 유지할 것이다.
우리는 ‘all weather’ 펀드다. 시장의 상황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투자한다. 겨울(crypto winter)이 와도, 공격적으로 계속 투자할 것이다.
우리는 사업가에게 경영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80명 이상의 운영팀이 있다. 채용, 규제, 소통, 마케팅, 스타트업의 일반적인 운영에 깊은 전문성이 있다. 정부와의 네트워크도 있다.
우리는 투자 단계, 자산 형태, 지역 등의 측면에서 유연하다. 우리가 크립토펀드를 만든 이유는 유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 단계부터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같이 개발된 단계까지 모두 투자할 수 있다. 주식이나 전환사채(Convertible notes: 국내의 CB와 비슷하나 일부 차이가 있음)와 같은 전통 금융 수단부터 코인과 토큰을 직접 사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투자할 것이다.
우리는 투기적인 케이스는 제외하는 데 집중할 거다. 수 십억 명의 사람들이 크립토 프로토콜에 기반한 서비스를 사용하길 바라며, 토큰의 가치가 실용적인 사용에 기반을 두길 바란다.
3. 올드머니(Old Money)
올드머니는 기존의 기관투자자들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벤처캐피털, 사모펀드, 자산운용, 펀드오브펀드, 각종 연기금과 공제회, 대학교기금, 대기업, 그리고 국부펀드까지 다양한 거금을 움직이는 플레이어들을 올드머니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고액 자산가의 돈을 다루는 프라이빗뱅킹과 대형 은행과 증권사도 포함됩니다.
아직 크립토 시장엔 올드머니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일부 벤처캐피털이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나 그 비율로 보면 올드머니의 0.01%도 안될 테니까 말이죠.
올드머니 리스트를 암호화폐와 관련해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3-1.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
벤처캐피털은 초기 및 성장 단계의 기업에 투자하므로 크립토 기업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은 자신들의 기관투자자들의 동의를 얻어 정관에 디지털 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추가 조항을 삽입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Andreessen Horowitz처럼 아예 새로운 펀드를 만들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벤처캐피털은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법이 문제이고, 기관투자자 역시 크립토 시장을 관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중국의 수 십 개의 크립토 펀드는 하나의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 한꺼번에 지원하는 반면, 우리나라 크립토 펀드는 각자 노선을 걷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3-2. 헤지펀드(Hedge Fund)
헤지펀드는 소수의 기관이나 기업, 혹은 사람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를 합니다. 일반적으로 벤처캐피털이나 사모펀드보다 자금운용이 용이합니다. 해외의 크립토 펀드로 불리는 다수가 바로 이 헤지펀드에 해당합니다.
3-3. 사모펀드(Private Equity)
사모펀드는 일반적으로 경영참여형 사모펀드를 말합니다. 즉, 주식을 인수해 경영권을 인수하거나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기업의 가치를 높입니다.
저는 이러한 방식이 토큰 이코노미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관전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이던 기업이던 어떤 형태의 중앙권력이 있다면, 그 권력(경영권)은 언젠가 매각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식처럼 토큰을 매각하고 인수하는 M&A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될까요? 아직 규제가 정비되어 있지 않으니 예단하기 어렵지만, 토큰 이코노미 생태계의 새로운 M&A 기회가 있을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구조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3-4. 펀드오브펀드(Fund of Funds)
펀드오브펀드는 대규모 자금을 위탁받아 다시 펀드에 분배하는 펀드 위의 펀드입니다. 이 투자기관의 최대 관심사는 포트폴리오입니다. (물론 포트폴리오는 모든 투자기관에게 중요합니다) 개별 펀드가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 분산 투자함으로써 위험은 줄이고 기대수익률은 높이는 게 관건입니다.
암호화폐는 그런 측면에서 포트폴리오에 편입하기 좋은 대상입니다. 기존 주식이나 채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며, 산업 역시 기존의 것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즉, 이질적이며 반대되는 특성은 역의 상관관계를 만들며, 이러한 특성은 포트폴리오의 위험 대비 수익률을 높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3-5. 연기금 및 국부펀드(Pension & Sovereign Wealth Fund)
연기금과 국부펀드는 자산운용계의 끝판왕입니다. 수 백 조원의 돈을 한 기관에서 다루기 때문이죠. 이들의 주요 투자 대상은 당연하게도 주식과 채권입니다. 그리고 대체투자도 일부 합니다. 대체투자의 비율은 각 기관마다 다른데 10%와 30% 사이입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암호화폐가 편입되게 되면, 매년 수 십 조원이 이들 연기금과 국부펀드로부터 흘러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맺음말
취재를 다니면서 많은 투자자를 만났습니다. 차익거래 플레이어, 벤처캐피털, 크립토펀드, 사모펀드, 펀드오브펀드까지. 이들 모두 이 시장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으며, 올드머니의 본격적인 진입은 암호화폐의 자산가치를 크게 높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다만 암호화폐의 가격 상승이 곧 블록체인의 가치 상승과는 다르다는 시선도 많습니다. 자본이 들어오면서 가격이 등 떠밀리듯 오르는 것이며, 블록체인이 실제 세계에 얼마나 가치를 제공할 지는 아직 불확실한 게 많아 보인다는 거죠.
어떤 투자자는 비트코인에 가장 큰 가중치를 뒀습니다. 비트코인은 수많은 암호화폐 가운데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가장 잘 달성했기 때문이죠.
한 벤처캐피털의 대표는 현재 암호화폐에 투자되는 돈은 투기성 자본이 대부분이며 분명한 거품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90% 이상의 돈은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거품은 블록체인 인프라를 구축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며, 필수적인 서비스의 탄생을 이끌어낼 거라고도 보고 있습니다.
돈을 먹고 자란 크립토 씬이 부디 탈 나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