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 흔히 한다. ‘예전에는 거기 참 좋았는데’.
나와 내 동생은 우리가 어린 시절 자란 동네가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는지 얘기한다. 친구들과 홍대 앞에서 술을 마실 때 마다 우리 이십대 때의 홍대가 얼마나 개성 있는 거리였는지를 추억하며 서운해한다. 부질없는 소린 줄 알면서, 어쩌면 지금의 모습이 더 많은 이들에게 편리하고 즐거운 모습일 수 있다는 것도 알면서, 이런 아쉬운 소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내 생활의 근거가 아닌 도시, 특히 외국의 도시에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반복되고 연속되는 경험이 제한되니까. 내가 그런 도시에서 만나는 모습이란 일정한 시기의 단편일 뿐이다. 나무로 치자면 줄기를 뚝 꺾어 나이테만 확인하는 거다. 하지만 내가 방문하기 전에도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성장했을 것이고, 내가 떠난 후에도 나이테를 불리다가 언젠가는 쇠락할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게다가 그것이 도쿄라면 더더욱. 한 달 사이에 멀쩡하게 서있던 랜드마크가 철거되고, 일주일전에 들렀던 가게가 없어지는 도쿄라면 더더더더욱.
도쿄에 여러 차례 들락거리며, '내가 도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도 여러 번의 변화를 거쳤다. 처음엔 이세탄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이 제일 좋았고, 그 다음에는 아사쿠사 뒷골목이었고, 한때는 오챠노미즈 역 주변이었다가 또 언제는 토덴 아라카와에 푹 빠져 아무 목적 없이 종점과 종점을 오갔다. 시모키타자와가 제일 좋았을 때도 있었고, 아오야마 공동묘지를 편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카구라자카였다. 도쿄 시내 서쪽에 자리한 자그마한 언덕마을로,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촘촘히 남아있다. 모세혈관 같은 골목을 쏘다니다보면 숨어있던 많은 얼굴이 모습을 내미는 동네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고풍스러운 옛 모습의 집들과 이제 막 생긴 세련된 가게들이 아주 적당한 비율로 잘 섞여 있었다. 새로운 가게들은 이 동네의 특유의 고즈넉하고 한가로움, 그리고 ‘자그마한’ 느낌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 홀딱 반한 나는 꽤 여러차례 카구라자카에 들렀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가기도 하고, 혼자 가기도 했다. 길가의 절에서 에마를 구경하고, 주먹보다 커다란 고기 만두를 사먹기도 했다. 동네 터줏대감이라는 어느 할아버지도 만나고, 이 동네에 불발탄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호통치는 할머니도 만났다. 예쁜 리스가 걸린 작은 카페, 우체통, 고양이 간판 등등을 발견하고, 많은 수다를 떨고, 이루지 못할 약속도 해 보았다.
그러다 일본드라마 <삼가 아뢰옵니다, 아버님>를 만났다. 이 드라마는 카구라자카의 터줏대감격 요정 ‘사카시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21세기의 도쿄의 한복판이지만, 그곳에는 아직 게이샤들이 오가고 여사장은 손님들 앞에서 샤미센을 켠다. 그런 ‘사카시타’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카구라자카에 부는 개발 바람에 따라, 사카시타의 부지에 고급 맨션 단지 신축 제의가 들어온다. 이 제의는 사카시타에 일대 파란을 불러오고, 그 안에서는 세대 간의 조용한 갈등이 벌어진다.
이 드라마에는 카구라자카의 성장과 변화가 나온다. 그곳이 생활이 근거지가 아닌 나로서는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카구라자카의 과거와 그 평화롭고 고즈넉해 보였던 모습은 사실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모든 것이 광속으로 달리는 듯한 도쿄에서 사람의 속도를 유지하는 곳이긴 하지만 엄연히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고, 내가 몇 시간동안 보았던 카구라자카의 모습은 사실 어느 순간의 나이테일 뿐이었다고, 이 드라마는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최근 나는 다시 카구라자카에 들렀다. 도쿄의 다른 곳에 비하면 정말 느리지만,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이 작은길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놓고 있었다. 처음 발을 들였던 2007~8년도에는 없었던 세련된 복합 쇼핑몰도 생겼고, 카페도 더 많이 늘었다. 모르는 가게, 처음 보는 가게도 많아졌다. 남아있는 곳도 있었지만, 없어진 곳도 많았다. 내 추억속에 남은 장면과 대부분이 맞아떨어졌지만, 조금씩 어긋나는 곳도 생겼다. 눈 안에만 담아두었던 곳의 변화는 아무렇지 않거나 반가웠지만, 추억에 담아둔 곳의 변화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원래 그런거다. 사람들이 ‘예전이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정말 그 모습이 그리운 것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그 시간을 살았던 자기의 모습을 더 그리워하는 거다. 내 마음에 새겨둔 것이 많은 곳일수록 세월의 변화가 아쉬운건 그 탓일거다.
삼가, 아뢰옵니다. 카구라자카.
저는 당신의 매력을 조금 알 뿐인 외국인에 불과합니다. 내가 보았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의 단면일 뿐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개발은 손길이 나날이 더 활발해질 테고, 그 때 이 수묵채색빛 거리도 많은 변화를 겪을 거라는 것만 짐작할 뿐입니다..
하지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이 거리에서는 조금만 시간이 천천히 흘러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기억하고 간직한 모습에서 너무 나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바라고 있습니다.
- 이 글의 문장 중 일부분은 2009년 출간된 본인의 책에서 발췌하여 수정한 것입니다. 출판사와의 계약은 종료되었습니다. 저작권의 주은 나야나 나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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