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수다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in #sct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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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전혀. 삶에 있어 엄청난 스펙인걸.

written by @hyunyoa


요즘 어떻게 지내?


이 말. 웬만하면 잘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물음이 상대방에게는 부담감과 뜻하지 않은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최소 몇 개월, 최대 몇 년 이상의 공백기를 가지다 만나게 된 이들에게는 정적을 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꺼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모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낯선 이들과 대화하는 일은 상당한 힘이 수반된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목적으로 술을 곁들이기도 하고, 일방적인 스피치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을 다물기도 해야 한다. 갑자기 화제가 넘어가면 안 되니 적당한 리액션과, 얕더라도 상대가 눈을 빛낼만한 얘기를 끄집어내야 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핑-퐁. 핑퐁이 맞아야 한다.

한동안 교류 없던 이들만을 만나다 다시 교류가 활발한 지인을 만났다. 서로가 취준생이었으니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또 떨어졌지 뭐, 라며 함께 땅굴을 팠다가 다시 또 흙을 덮고 나오는 사이였으니 부담감 없이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러자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며, 자기소개서도 쓰기 싫고 포트폴리오도 만드는데 지쳐서 그냥 친구들을 만나는 중이라 했다. 그녀가 보인 캘린더 속 일정들은 친구들의 이름과 함께 형형색색의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소득 없는 얘기만 한다고, 넷플릭스 추천이나 있었던 일을 나누는 것뿐이라 일축했다.

그런데 수다는 엄청난 스펙이다. 여기까지 스펙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성과 중심의 분위기상 수다를 떠는 시간보다 자기 계발을 하는 일이 더 높은 가치로 인정받으니까. 말을 잘하는 법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시기라 그거야 중요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려나. 그러나 그들이 중요하다는 말은 '좌중의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끄는 법' 혹은 '공식적인 스피치에서 논리 정연하게 말을 정리하는 법'이다. 내게 그만큼 중요한 건 일상의 말이다. 낯선 이들과 물꼬를 트는 게 아닌 그냥 친한 친구들끼리의 대화.





말의 가장 큰 특징은 백스페이스를 누를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새로운 자리라면 자연스럽게 몸에 힘이 들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궁리하게 되지만, 자주 그리고 오래 만난 지인들과는 비교적 그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한마디로, [←BackSpace] 버튼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친한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그 이유는, 괜스레 마음이 상하게 되는 말을 듣더라도 쉽게 절교하거나 아쉬운 말을 건넬 용기가 없어 입을 다물기 때문에. 벽이 허물어지는 사이일수록 자연스레 무뎌지게 되니 나는 매번 우리의 사이를 자각하려 애쓴다. 그래서 내게 친한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누는 일은, 스트레스가 풀리긴 해도 한편으로는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하며 에너지를 쏟는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힐링을 주고받는 사람이었다. 나처럼 언제 실수할까 전전긍긍하며 집에 돌아와서도 '혹시 그때 내가 실수했던 거면 어쩌지? 조금 더 위로했었어야 했는데.' '너무 빠르게 화제를 돌렸나.' 라며 조마조마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나의 전사를 꿰뚫었고 내가 싫어하는 음식, 내가 싫어하는 화제, 반면에 눈을 빛낼 수 있는 그런 흥밋거리를 모두 캐치해내 탁구대를 마련하는 이였다. 내가 핑퐁에 신경 쓰지 않아도 얘기가 잘 흘러가게 만들어주는 이. 나는 그래서 친구들과의 수다가 엄청난 능력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개개인마다 다른 배경이 있을 텐데, 개별 맞춤형 탁구대를 마련하는 사람이라니. 친한 친구들과 잘 소통하는 사람들, 역시 대단하다. 비록 그들은 "이게 무슨 능력이야. 그냥 친구들끼리 수다 떠는 건데." 라 말하지만. 내게는 그게 참 부러운 능력이니까.

물론 낯선 이들을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하게 하는 것 역시도 엄청난 능력이다. 주체적으로 새로운 모임에 가입해서 교집합이 없는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그를 넘어, 상대방이 이 사람과 말하는 게 참 즐겁다! 라는 생각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반기게 되는 일은 아주 아주 대단한 실력이다.

그러니까, 수다 떠는 일은 엄청나게 쓸모 있는 일이다.


(+) 장류진 소설가의 신작,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이런 구절을 마주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고 까이는 장면'인데, 참 생각이 많아지는 대사라 첨부해 보자면!



"진짜 모르겠어요? 내가 지유씨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 여자 만날 만큼 만나봤어요. 그런데 여태까지 이렇게, 진짜,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지유씨 좋아하는 거라고요."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 「일의 기쁨과 슬픔」 中〈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p.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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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에 그런 친구가 있었네요. 사소한 것도 다 기억해주고 존중받는 느낌을 주던 친구였는데....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많은 이들을 그렇게 기억하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사소한 것도 기억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주는 친구!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말 만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다 ㅠ_ㅠ 그래서인지 발견하게 되면 마음이 훅 가게 되는 것만 같아요. 많은 이들을 기억하는 과정에 보람과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꽤 있더라구요 =) 도잠님의 지인분 역시도, 피곤하다는 감정보다는 보람과 흥미를 느끼셨을 거라 생각이듭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말'을 잘 해나가는게
그 순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지만
돌이켜보면 능력이 있으니깐 잘 해나간거라는걸
새삼 돌아보네요

맞아요. 길거리에서도, 그리고 어느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서도 얘기를 하는 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으니까요. 정말 그게 모두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ㅠ. 새삼 돌아본다는 말씀이 인상 깊어요. 돌아볼 수 있는 얘기들 많이 적어내려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리스팀도 정말 감사해요 :)

말의 가장 큰 특징은 백스페이스를 누를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이 문장에 유독 눈에 띄네요! 정말 재미있어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이도 이제 곧 마흔이고, 남자이다보니 수다를 떨 일이 많지 않습니다. 아내는 저와 수다를 떨고 싶어하는데, 저는 그냥 듣기만 하네요.

다른 사람들과 하게 되는 대부분의 대화는 전화 통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거의 비지니스적 대화이다 보니 수다라고 말할 수 없죠.

돌아보면 저도 수다를 꽤나 좋아했던 사람인데,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하네요.

백 스페이스! 재밌다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ㅎ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또 그마저도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그래서 하루 한번 씩은 누군가에게 오늘 일상속 발견했던 풍경이나 상황을 말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ㅠ_ㅠ

+) 헛 리스팀해주셨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듣는 것만 잘해서 인간관계의 반은 성공이죠
게다가 말하는 것도 잘하면 더없이 훌륭한 인간관계가 될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수다는 반드시 필요한 패시브 스킬이죠^^

듣는 것만 잘해도 인간 관계의 반은 성공 ! 맞아요. 요즘엔 단톡방을 보더라도 자기 할 말만 하려는 집단적 독백이 많은 것 같습니다 ㅠㅠ 이젠 듣기보다 천천히 말을 시작하는 것으로 (?) 패시브 스킬을 키우겠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나이가 들어가며 만나는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수다의 내용도 의미도 무척 달라지는 것 같네요.
수다는 역시 갈고 닦아지는 스펙이자 연륜처럼 깊이있게 쌓여지는 내공과도 같은 거랄까요~
수다와 같은 의미없는 대화에도 늘 진심이 담겨있으면 더할나위 없는 것 같습니다...

대화에 진심이 담겨졌다는 걸 느낄 때면 단순히 그 시간을 넘어 제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져서 행복한 것 같아요 ! 상대방의 관심사에 맞춰 시시각각 대화 주제를 변경하고 그 사고를 펼칠 수 있다는 게 연륜과도 깊게 관련있는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개인에게 맞는 탁구대를 준비하는 능력이라니 정말 세상에서 제일 탐나는 능력 중 하나네요. 어느 누군가를 만나도 어느 다수를 만나도 그 분위기를 편안하게 해주고 자연스럽게 해 주는 이가 있다면 정말 재미있죠.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이네요.

수다라 표현하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편하게 해 주는 능력은 정량화할 수 없는 큰 인생의 스펙입니다 정말..

자신이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 선에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건 정말 부러운 것 같아요 :) 저도 꼭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량화할 수 없는 스펙을 키워내야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디지털 시대가 오며 사람들은 더 많이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제대로 된 대화는 줄어들고 있죠. 항상 다른 사람과 연결된 것 같지만 그렇기에 진정 혼자만의 시간은 보내지 못 하니까요. 깊이 있는 말들은 고독 속에서 쌓여가는 법이거든요.

제대로 된 대화가 줄어들고 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sns를 끊고 홀로 고독을 마주하니 확실히 더 탄탄해지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kmlee님 항상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