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절벽
그는 관계의 절벽에 서 있다. 절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은 계속 서로에게 무언가를 전가하며 절벽에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들판에서 만났다. 들판의 크기는 관계의 크기를 말해 주듯 넓게만 보였다. 그 들판만큼 상대의 가슴도, 이해의 폭도 넓으리라 연상되었다. 그것은 그래서 신기루였다. 신기루 속에서는 서로에 대한 환상만 자극하게 된다. 그것이 허상인 줄도 모르고 환상만 키워가게 된다. 물론 경험이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들판은 상대의 크기가 아니고 신기루는 곧 꺼져들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또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관계의 들판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를 긍정한다. 한없이 긍정한다.
긍정의 힘으로 시작된 관계는 서로에게 뜬구름을 선사한다. 그것은 구름 타고 날아다니는 신선 같아 보이기도하고 한없이 자애로운 여신 같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러한 환상 속의 그대를 동반자로 맞이하고 싶다.
손을 잡는다. 신기루 속에서 사람과 사람, 남자와 여자, 동료와 형제자매들이 손을 잡는다. 그것으로 계약은 끝이 났다.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니 상대들에게 의탁된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모두를 끌어안고 싶다. 그러나 행동은 오히려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판에서 만난 이들이 산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등반을 시작하자 한없이 넓을 것만 같던 들판의 면적이 점점 좁아진다. 그들이 등반을 시작하게 되는 데에는 관계의 시작에서 비롯되는 흥분감이 주요하다. 그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주 잡은 두 손은 온 들판을 다 휘젓고 갈아엎을 듯하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들 앞에 굴복할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사랑하니까! 우리는 운명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뚝 솟아야 한다. 이 넓은 들판에서는 우리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내비칠 수가 없다. 자! 가자! 오르자! 저기 저 산의 정상에서 우리의 맞잡은 손이 얼마나 위대한지, 저 아래 사람들에게 번쩍 들어 보여주자!
그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환상은 곧 불안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관계가 영원하고 싶다. 맞잡은 손들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들판은 모두의 것이다. 모두가 손을 내미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서로의 관계가 언제 끊어져 나갈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이다. 엄습하는 불안이다. 지금 연결된 이 손이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떨어져 나가게 된다면 신기루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을 올라야 한다. 아무도 오르지 않을 산일수록 좋다. 한없이 높고 한없이 위대할수록, 관계의 단단함은 더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산에 오르자. 우리, 들판에 머물지 말고 산에 오르자.
그들은 감행한다. 맞잡은 손을 더 꼬옥 쥐고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지점. 바로 이 결단의 지점에서 망설이는 손들이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저는 아직 준비가..’
‘집에 처자식이..’
‘부모님의 반대가..’
‘신념이 달라서..’
가라. 가도 좋다. 짧았지만 즐거웠다. 붙잡은 손은 어디까지나 흥분의 일탈이었나 보다. 괜찮다. 인생이 다 그런 거다. 들판이니 누구든 누구와든 손 붙잡고 춤출 수 있다. 그러니 이것도 그리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가도 좋다. 하지만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진 말아라. 그러다 들판 죽순이, 죽돌이로 소문나면 누군들 좀처럼 손 잡으려 하지 않을 테니. 그때에는 들판의 변두리에서 입맛만 다시게 되는 거다.
그들은 손을 놓고 떠났다. 아쉬움은 없다. 차라리 산에 오르기 전이니 다행이다. 불필요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아서 좋다.
이제 남겨진 이들은 소수이거나 다수이거나 한 번의 내홍으로 더 단단해진다. 그러기 마련이다. 그것은 분리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맞잡은 손. 그리고 연결된 우리는 아직 구별되어 있지 않다. 그들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수 있고, 언제든 관계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기 시작한 그들은 이제 들판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역사가 생겨나고 추억이 생겨난다. 기록이 남겨진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제 들판의 무리에서 그들로 분리되는 것이다. 들판에 솟은 산은 분리된 자들의 방명록인 것이다.
오른다. 그들은 이제 부담을 지기 시작한다. 한없이 내달려도 언제나 평지였던 들판을 떠나, 한 발짝 한 발짝 힘을 주어야 하는 등반은 중력의 위대함을 경험하는 도전이다. 흥분의 에너지가 아직 충만하니 등반의 시작은 매우 가볍다. 게다가 들판에서 경험한 결별이 있다면 그들은 더더욱 하나로 똘똘 뭉쳤으리라.
우리는 다르다.
그것이 오르는 자들의 자부심이다. 이것이 오르는 자들의 쇠고랑인 것이다. 그들, 달라진 그들은 관계의 쇠고랑에 서로를 묶고, 이제 당당히 ‘우리’라 지칭하며 들판으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들판의 이들에게 이미 완성된 관계의 고리를 들어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더 구속하고 싶어진다. 규칙이 만들어지고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래야 한다. 우리는 다르니까. 들판으로부터 솟아오른 우리는 저 들판의 외톨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니 우리는 모범을 보여야 하고 ‘우리’의 품위에 걸맞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
산을 오를수록 보이는 것은 ‘우리’뿐이다.
그렇다. 들판은 어느새 멀어지고 들판의 외톨이들은 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거친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는 그들의 눈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경사와 그리고 ‘우리’만이 보일 뿐이다. 이제 남은 적은 경사와 ‘우리’뿐이다. 아무도 공격하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우리와의 갈등만이 예고되고 있을 뿐이다.
갈등은 공기와 같다. 들판의 갈등은 외부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들판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산 위의 갈등은 내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구? 너밖에 없으니까.
“말 좀 친절하게 할 수 없어?”
“그만 좀 불평해!”
“어디서 반말이니?”
“그만하자..”
_ written by 교토바다
[교토바다 단편선]
스타벅스 사내의 행동편향
질투의 화염
세계 최고의 와플과 나이를 잃은 아가씨
스타벅스 사내의 횡재
스타벅스 사내의 슬픈 쌍꺼풀
스타벅스 사내의 귀환
다시 태어나도 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