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그녀는 이쁘다

in #zzan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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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녀는 이쁘다

그날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한겨울에 비가 아침부터 질금대더니 점심 무렵에는 대놓고 쏟아졌다. 연말 마감과 신년도 예산 편성이다 뭐다 해서 과로했던 터라 이러다 몸살 나겠다 싶어 하루 월차를 냈다. 우중충하게 비도 오는데 이불 둘둘 말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계획을 비웃듯 몇 층인지, 벽을 난도질하는 드릴 소리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차 열쇠를 집어 들고 어쩔까 망설이다 간만에 도서관을 향했다. 평일 시립도서관의 풍경은 기출문제집을 뒤적거리는 퇴직자들마저 없었으면 절간 같다. 더러 노인들이 졸며 깨며 앉아 있지만 난방기 돌아가는 소리를 이기지 못했다.
사실 시립도서관은 일상에 지친 내 쉼터다. 그곳은 늘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가족들과 월급보다 더 많은 능력을 요구하는 직장 상사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서가를 누비며 눈으로 세계 여행을 하든, 몇 권 포개고 단잠을 자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다 시장하면 지하 매점에 내려가 컵라면에 김밥을 먹어도 좋고.
역시나 오후 3시의 매점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이 없나 돌아보는데 주방 쪽 아이스크림 냉장고 위에 컵라면이 종류별로 삼단으로 쌓여있는 뒤쪽에서 굼뜨게 움직이는 머리가 보인다. 그녀는 한쪽 다리가 짧다. 안면이 있기에 가볍게 인사를 하며 겨울방학인 것 같은데 손님이 없다고 하니 요즘에는 방학이어도 학생들이 도서관에 별로 오지 않는다고 조용히 답한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김밥을 하나 입에 넣으며 말을 붙였다.
“여사님, 지금도 피부가 그리 고운 거 보면 젊었을 때 한 미모 하셨겠어요.”
“엄마가 피부가 좋았대요..... 인물값 했지.”
비가 와서 였을까? 엄마와 인물값이라는 단어는 키 작은 여자의 마음 저 밑을 흔든 모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로부터 조근 조근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야말로 ‘책 한권’으로는 모자라는 그녀의 인생사였다.

우리 친정 엄마가 인물이 좋았어요. 그래서 인물값 했지. 오빠랑 나 낳고 집을 나가버렸어. 오빠는 엄마를 기억했는데 난 기억도 안나. 세 살 때였으니.
나간 이유야 나도 모르지. 나중에 한번 먼발치서 본 적이 있는데 아부지한테 돈만 받고 그냥 가버리대. 불러볼 생각도 안했어요. 내가 계모한테 구박받고 사니 불쌍하다고 아부지가 엄마한테 돈 주고 데리고 가라고 했는데 번번이 돈만 받고 그냥 가버린 거지요.
아부지는 생선 장사를 했어요. 아부지 고향이 이북인데 거기도 남매를 두었다고 들었어. 서울 창천동 살았는데 어린애만 둘이니 새 여자를 들였지요. 애 못 낳는 여자를 소개받아 데려 왔다는데 웬걸, 들어오자마자 아들 둘을 떠억 하니 낳은 거여.
아부지 있을 때는 잘해 줬지. 아부지가 새벽 4시면 물건 받으러 나가면 아침밥도 안줘. 아부지 안들어 오는 날은 지하실에 오빠랑 나랑 가둬놓고 못나오게 해서 거기서 잤어요. 지금도 연탄가스 냄새랑 쥐, 바퀴벌레, 곱등이만 보면 진저리가 쳐져.
학교 가는 날은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싸주는데 자기 아들들은 흰밥에 계란, 소세지 반찬 싸주고 오빠랑 나는 꽁보리밥에 김치 아니면 팔다 남은 생선 반찬 싸 줘. 그게 그렇게 챙피하고 서러웠어. 그래서 지금도 난 생선 안 먹어요.
우리 집이 못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차별 두고 때린 걸 보면 자기 새끼 생기면 남의 새끼가 싫은가 부죠. 아부지 재산을 나누는 게 싫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괴롭히니 살 수가 있나. 국민학교 6학년 졸업 쯤 해서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어 집을 나갔어요. 갈 데가 있나? 밤새 돌아다니다가 동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니 새벽에 목욕 다녀오던 동네 아주머니가 집 나왔냐고 묻더라구요. 아마 우리 집 사정을 알았던 듯 해요. 그 아주머니가 소개 시켜준 곳이 보신탕집이었는데 거기서 잔심부름을 했어요. 작은 여자애가 제 키 보다 큰 물지게 지고 물 깃는다고 사람들이 뭐라 하던 기억이 나요. 양철통에 물을 담아서 지고 오면 땅에 끌리고 출렁대서 반도 안 남았어, 호호.
거기 몇 달이나 있었나.... 어느 날 어떤 젊은 여자가 자기가 월급도 주는 좋은 곳에 취직 시켜준다고 주소를 줘요. 멋 모르고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파주야. 아니, 가서 보니까 세상에, 채소밭이 끝이 안보여. 거기서 며칠 만에 도망쳤지. 그게 어디 아이가 감당할 일이요? 호미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데.
그 다음엔 방직 공장 같은 곳에 갔는데 시다라고 하죠? 거기서 일하다 추운 겨울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어. 내 나이 열네 살에. 그 때 150만원만 있었으면 수술할 수 있다고 했는데 계모가 허락했겠어요? 나도 수술시켜 달라고 안했어. 그냥 저냥 시간만 끌다 결국 이지경이 됐지.
그렇게 고생하는데 열여덟 살 때 집에서 연락이 왔어요. 주민등록증이 나왔으니 찾아 가라구. 찾으러 갔다가 그대로 집에서 1년을 꼬박 누워 있었어요. 어디 아픈데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운신을 못하겠더라구. 그냥 계속 자고 또 자고 했지요.
아부지 장사가 잘 되었는지 방이 여러 칸 있는 집으로 이사 가서 세를 줬더라구요. 가운데 방에 할머니가 혼자 살았는데 아부지가 매일 아침 100원씩을 주면서 우리 애 좀 봐달라고 계모 몰래 주고 갔대요. 난 몰랐어. 나중에 그 할머니가 죽었는데 장판을 들추니 아부지가 준 백원짜리가 다 있더래요. 예전엔 다들 장판 밑에 돈 숨겼잖아, 하하.
오빠? 오빠는 돌아가신지 벌써 삼십년도 더 됐어. 연탄가스로. 오빠도 일찍 집 나와서 고생고생 하다가 장가가서 이제 좀 재미나게 사나 했더니 그것도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그 지경이 됐지. 부부가 같이 가스를 맡았는데 올케만 목숨을 건졌지. 재혼했다고 들었고.

은산은 언제 왔냐고요?
서른셋에 은산으로 시집왔으니 삼십 년이 넘었네요. 서울서만 살아서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어. 남편은 시누이의 친구가 소개했지. 오빠 돌아가시고 몇 년 지나 아부지도 돌아가셨으니 의지가지 할 데 없는데 아는 동생이 괜찮은 남자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소개해서 은산까지 내려 왔는데 인상이 나쁘지 않더라구요.
면사포도 못쓰고 혼인신고부터 했어요. 근데 남편이 알콜 중독자더라구. 장가를 들여 놓으면 여자들이 얼마 못 살고 도망가니 집안에서 혼인신고부터 해 버린 거에요. 신혼 살림집이라고 들어가 보니, 내 잊혀지지도 않아, 대문도 없는 집에 열 달치 60만원 선불인 방 한 칸짜리야.
남편은 가진 기술도 없고, 공사판에서 뒷시중 들어 주고 일당이나 벌어서 술 홀라당 마시는 사람이었어요. 시댁 식구들은 행여 내가 도망 갈까봐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렸지. 간 부종이 심해 병원 데리고 다니며 고쳐 놓으면 또 마시고, 좀 나아지면 또 마시고.... 그렇게 십오 년을 살다 돌아가셨어요. 애는 안 생겼구요.
그 사람 그래도 돌아가실 때도 나만 찾더라구요. 남편 가고 나니 시댁 식구들이 발길을 아주 딱 끊대요? 가끔 시내에서 마주치기도 하는데 모른 척 하고 지나가더라구. 그래서 나도 아는 척 안했어. 그들은 그들대로 살고 나도 아쉬울 거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아무 걱정은 없어요. 매점에서 용돈 벌어 쓰고, 여기 청소하는 동생들과 자매간처럼 지내요. 기초수급자라 사망하면 시에서 백 팔십여 만원 나온다고 하니 그거로 화장하고 뒷처리 해주겠지요. 보험 아줌마들이 보험 들라고 하는데 나 그런 거 안 들어. 나 죽으면 그거 얼굴도 모르는 계모 남동생들에게 갈 거 아녜요?
바라는 거요? 암것도 없어요. 사는 게 그냥 담담해요. 가끔 밤에 잠이 안 오는 게 문제지. 명절이 싫구.

손님 오셨네. 뭐 드려요? 라면에 김밥 한 줄이요? 잠시 기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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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푹빠져 정독했네요
음~~~
사람냄새 나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참 힘들게 살아오신 삶 이네요..
계모만 좀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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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좋은 계모도 있을텐데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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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단편 소설 잼나게 봤어요~^^

아침드라마 같지요?
마음이 무거우실텐데도 글을 읽어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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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아주머니 인생이 정말 책 한 권으로 모자라겠습니다.
모진 풍파 다 겪고 암것도 바라는 게 없는 현재의 모습에 괜시리 가슴이 아리네요. ㅠㅠ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완전 심취하고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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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축하드려유~^^ 💙 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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