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26일 우덕순 피살
구한말에서 일제 중기까지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지금과는 판이하다. 기독교 교회는 항일운동의 온상이고 근거지고 배양지였다. 이만열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이재명, 광복군 의열단으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 서울 시내에서 수백명의 일경과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만주에서 싸운 평강열 등이 다 크리스천 청년이었다. 1921년 청산리 전투에서 선봉에 선 대한신민단은 크리스천 청년들로 이뤄진 부대였다.......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개신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지만 경찰에 체포된 수의 17~22%가 개신교인이었다”
3.1 운동 당시 외국인 주교의 명령을 받은 한국 천주교회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에 분격한 기독교인들이 성당에 뛰어들어 “당신들은 조선 사람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린 적도 있다 하니 당시 기독교인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먹혀 들어가면서 전반적으로 그 옹골찬 기세를 잃기는 하지만 일제에 맞선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활약은 특기할만한 역사고 본받아야 모범이라 하겠다.
그 가운데 한 명을 더 든다면 가톨릭 신자 도마 안중근과 더불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자 했던 충청도 제천 사람 우덕순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나이 스물 다섯의 호방한 청년이던 그는 기울어 가는 나라를 통탄하며 조국을 떠난다. 우덕순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했고 젊은 나이에 그는 벌써 장로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 우 장로가 간 곳은 러시아령. 그곳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펴는 한편 북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이 이끄는 의병 부대에 가담하기도 했다.
1907년 5월 그는 한 잘 생긴 황해도 출신 남자를 만나게 된다. '1907년 애국동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곧 친숙해 졌다. 그와 나는 동갑인데 내가 2월생이고, 안은 5월생이다‘ (우덕순 회고) 바로 도마 안중근. 그는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경흥, 회령 등지를 들이치기도 했고 일본군에 체포되었다가 탈옥을 감행하는 비상한 용기를 보여 주기도 한다. 다시 러시아령으로 건너와 장사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고 온 것은 안중근이었다.
“러시아 외상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군. 25일 장춘을 떠나서 하얼빈에 도착한다오. 놈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우덕순의 회고에 따르면 소식을 전하며 안중근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가야지.” “어디로?” “하얼빈에 가야지.” 그것으로 모든 결정(?)은 끝났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종의 대명사였다. 침략의 원흉으로서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인들의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덕순은 뛸듯이 기뻐하며 거사에 가담한다. 후일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한 것처럼. “이등 공은 일본천황과 정부를 기만하고 한국에 대해 압박을 가하는 자다. 이등 공을 죽이지 않으면 아 동양삼국의 평화유지는 도저히 희망이 없다. 이등 공의 탐학한 대한정책은 천하를 속이고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기사 등을 읽고 늘 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번 안(安)의 유인에 응하여 살의를 결심한 것이다. ”
그들에게 무기를 장만해 준 것은 이강과 유진율이라는 사람이었다. 둘은 무기를 건넨 뒤 “삼천리 강산을 여러분이 지고 갑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마 안중근과 우덕순의 눈에도 물기가 서렸으리라. 거사일은 다가오고 이토가 자기 명이 끝날 줄도 모르고 득의양양 대륙을 관통하던 어느 날, 안중근은 시를 지어 긴장된 마음을 달랜다. 그것이 유명한 장부가. “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구나. 천하를 굽어보니, 어느 날에 뜻을 이룰까. 동녘바람은 날로 차가운데, 사나이의 가슴은 뜨겁기만 하구나. 지난 분함은 떨쳐 버리고 반드시 뜻을 이루리.....” 여기에 우덕순이 시로써 화답한다. 아니 시가 아닌 울부짖음으로.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너를 만났도다 너를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 만야런고 너를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윤선 혹은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여 로청양지 지날때에 앉을때나 섰을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소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오호간악 이도적아 아등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없이 뺏노라고 궁흉참악 저수단을 ........... 중 략 ...........
오늘네가 북향할줄 나도역시 몰랐노라 덕닦으면 덕이오고 죄범하면 죄가온다
너뿐인줄 알지마라 너의동포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
둘은 각각 다른 역을 맡기로 한다. 하얼빈역과 그 전역이었던 채가구역. 원래는 우덕순이 하얼빈을 맡기로 했지만 안중근이 자기가 하얼빈으로 가겠다고 고집해 임무가 바뀌었다. 그리고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였고 우덕순은 비상이 걸린 러시아 군대에 체포된다. 그는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거사 성공 소식을 듣는다. 그때 우덕순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는 안중근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 후일 사형당한 안중근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대면한다. 그에 따르면 얼굴이라도 보려고 했는데 교도관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5년 징역을 치른 후 그는 계속 만주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그는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만난다. 언젠가 한겨레 21에 났던 이종두라는 분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당시 그는 치치하루라는 곳에 있던 난민 수용소에서 조선인들의 지도자 역을 했다. 원래는 그곳에 복역하고 있었다가 일본 패망 후 역할을 맡은 것이다. 지역의 소련군 지휘관도 안중근의 일을 알고 있었고 우덕순 앞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우익계 정당 대한국민당에 몸담는다.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 김좌진도 공산주의자들 손에 죽었고 만주에서 조선 사람들끼리 좌우가 갈리고 노선이 틀려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귀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역시 좌익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선택 때문이었을까. 1950년 9월 26일 서울 수복 이틀 전 그는 인민군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이토를 두고 “너 뿐 인줄 알지 마라. 너로부터 시작하여 너의 동포 5천만을 보는 대로 죽이리라.”고 일갈하던 서슬 푸른 청년은 일흔 나이에 동포의 손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