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야자 시리즈] 금서 속으로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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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에세이, '탈출 전문가'에서 일부 내용은 이어집니다.



 연습장을 야간 자율 학습의 탈출 도구로 사용할 때는 단 한 번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금서(禁書)에 손대기 시작했을 때, 위험 수위가 급격히 높아졌다. ‘금서’의 기준은 이랬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단편소설 100선>이나 <수능에 출제되는 소설 100선> 류의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 모두!

 아주 가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단편 소설인데, ‘교과서’나 ‘수능’이 붙은 제목의 책이 아닌, ‘누구누구의 소설집’ 같은 제목의 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금서’ 취급을 받은 경우다. 그 소설을 읽고 있던 친구는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하고, 귀를 잡혔다. 당일의 야자 지도 선생님이 국어가 아닌 수학 선생님이었던 것이 그 친구에겐 불행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들은 냉철한 알파고처럼 야자 시간 중의 독서를 통제하셨다.

 내가 빠져든 책은, ‘금서’중의 금서였다. 귀가 아니라, 머리채를 잡혀도 할 말 없는 책이었다. 바로 무협지의 아버지, <영웅문> 시리즈였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홍콩의 무협 작가 김용이 쓴 세 권의 책이 고2때 우리 독서계를 강타했다. 원제는 각각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출판사 ‘고려원’에서 영웅문 1~3권으로 나왔다. 무협 장르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을 때, 단 하나를 읽어야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이 영웅문 시리즈를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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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에서 출판된 영웅문 시리즈. 이후 김영사에서'사조삼부곡 시리즈'로 원제를 달고 재출간되었다.

 이 책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제목들은 낯익을 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에 이 책들은 영화와 드라마로 수없이 제작되어 나왔다. 이 책들은 무협 이야기 세계에서 매우 큰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무협 컨텐츠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책의 어마어마한 위상도 야자 시간엔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영웅문 시리즈가 그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의 일상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끼쳤는지 잠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한 8명쯤 되는 내 친구들 무리는 점심을 먹고 나면, 바깥으로 산책을 나가서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큰 바위가 있는 작은 학교 숲으로 들어가곤 했다. 거기서 우리가 한동안 했던 놀이가 바로 영웅문 역할 놀이였다. 그 책들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저마다 개성과 매력이 그렇게 뚜렷할 수가 없었다.

 의협심 넘치고 꾸밈이 없어 주어진 상황을 매번 묵직하게 돌파하는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 약삭빠른 면도 있고 조금은 어두운 정서를 갖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지고지순한 <신조협려>의 주인공 양과, 어리숙하고 선한 마음씨를 지녔지만 결단력이 없고 우유부단한 <의천도룡기>의 주인공 장무기. 거기다가 주인공들과 인연을 맺는 중원의 최고수 다섯 사람.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천하 고수, 중신통 왕중양,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황야, 북개 홍칠공. 이들은 지금으로 치자면, 개성이 뚜렷한 어벤저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캐릭터의 스핀 오프 시리즈도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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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은, 영웅문의 등장인물인 서독 구양봉과 동사 황약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동사서독' 서독은 장국영, 동사는 양가휘가 맡았다. 2013년에 재개봉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도 장국영의 아우라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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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걸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던, 영웅문 시리즈의 3부, '의천도룡기' 원작이 워낙 방대한 이야기라 영화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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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버전으로 드라마화 된 '신조협려'. 신조협려의 여주인공 소용녀 역할을 맡은 여배우들의 싱크로율 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역대 소용녀 역할을 맡은 10여명의 배우가 후보로 등장하는데, 그 중 최고의 소용녀로 인정받는 유역비

 영웅문을 보았던 나와 친구들은 이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 캐릭터의 어법으로 무공 대결을 펼쳤다.

 “나의 일양지를 받아라. 세 번의 초식 안에 너를 제압하겠다!”
 “그렇게는 안 될 걸. 내게 섣불리 대적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이가 한 둘이 아니다.”
 “넌 내가 이미 구음진경을 연마한 걸 모르고 있구나!”
 “너희 둘 모두, 나의 쌍수호박권으로 한꺼번에 상대해주겠다.”

 <영웅문>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들어와서 우정을 확인하는 요긴한 놀이가 되었다.

 한동안 내 저녁도, 이 책이 접수했다.(1~3부 각6권으로 총18권의 방대한 분량이었으니 꽤 오랜 기간의 야자 시간에 이 책과 함께 했을 것이다.) 나는 완벽히 엄폐한 상태로 무림의 고수들을 만났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교실 밖 발코니 사이를 넘어 다니며 우리의 야자 시간을 지도하셨다. 창밖으로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간 느낌이 들면, 그건 어김없이 지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경공술을 펼치는 무림 고수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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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그 날도 나는 중원으로 탈출하여 무림의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대각선 앞쪽에 앉아 있던 두 녀석의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높아졌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말다툼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경공술을 펼치던 선생님은 우리 교실 밖의 발코니에 안착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발코니로 통하는 교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셨다. 말다툼 하던 두 녀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셨다. 아주 잠시 동안의 소란이라, ‘주의’ 정도로 끝날 것 같았다. 선생님은 두 녀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매서운 눈빛으로 경고하셨다. 그 녀석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생님이 교실 뒷문을 통해 복도로 나가시려 했던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그때까지 난 소설 <영웅문>을 당당히 펴놓고 있었다.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 긴장해서 급히 책을 숨기려고 하는 애들은 100퍼센트 의심을 받고 걸리곤 했다. 난 선생님의 동선이 내 쪽인지 예상치 못했기에 책을 숨기려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었다. 선생님이 내 쪽으로 돌아서셨고, 선생님의 시선은 정확하게 내 앞의 책으로 꽂혔다. 선생님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서셨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책을 집어 들어 표지를 읽었다.

 “이 노무 자슥!”

 그는 책을 내 책상에 떨어뜨리고는 바로 내 귀를 잡았다.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순간, 소싯적에 무림에서 무술을 연마하신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복도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금서를 읽은 죄로 곤장 형에 처해졌다. 선생님이 든 둥근 지도봉으로 엉덩이 다섯 대를 맞고 차가운 복도에 꿇어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에 석방되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자의 시공간 밖으로의 ‘탈출’이 적발된 날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난 ‘탈출’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자, 수시로 ‘탈출’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고교 시절, 야자 시간에 감행했던 탈출이 얼마나 안전하고 수월했던 거였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땐 탈출의 비용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 내가 할 일을 내팽개치고 탈출한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한다.

 탈출 욕구가 가장 컸던 사람은, 교실 밖 발코니를 넘으며 경공술을 펼치시던 선생님들이 아니었을까. 금서도, 워크맨도, 연습장도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오로지 모든 시간을 정직하게 견뎌내고서야 비로소 일상의 의무와 책임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자율학습에 붙들린 고등학생이나 직장에 붙들려 있었던 선생님들이나 모두 '야자'라는 거역할 수 없는 배를 타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선생님들이나 우리들이나 서로를 탈출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 밤을 함께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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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천도룡기는 뭔가 정말 아쉬웠던 영화죠.. ㅠㅠ
시리즈 제작으로 조금만 더 풀어냈으면 좋았을 영화..

그러게요... 그 원나라 관원으로 나온 여성 캐릭터가 엄청 매력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마지막에 따라오라고 하면서 끝났던 것 같은데요ㅋㅋㅋ

네 맞아요. 보통 방대한 원작으로 만든 한편짜리 영화는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더라구요.ㅎ 반지의제왕처럼 3시간짜리 3편은 돼야,,ㅋ

선생님인 친구들이 “아 학교가기 싫다~”를 입에 달고 살더라고요ㅋㅋㅋ 확실히 학교가는 것보다 회사가는게 더 곤욕이 아닐지

ㅋㅋ 학교에선 고상하게 인의예지를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생활인이니까요. 사람 욕망이라는 게 다 비슷한거죠.ㅎ

고1 어느 월요일, 친구가 영웅문 1편 1권을 학교에 가져온 게 화근이었습니다. 토요일까지 꼬박 6일을 하루에 한 권 씩 독파했죠. 그 후 무협지를 끊었습니다. 신조협려는 나중에 보긴 했죠. ㅎㅎ... 여자는 무릇 황용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죠..ㅋ

영웅문의 늪에 빠지셨었군요ㅋㅋ 하루에 한 권! 대단한 몰입도입니다. 곽정, 황용의 여정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저도 2,3부 여주인공들보다 황용이 제일 좋습니다. 어린 마음에 곽정을 부러워했던ㅋ

학교 샛길의 큰 바위는 흡연장소로 적절했겠는데 건전하게 장풍만 날리셨네요? 범생이이십니다.

고교 시절엔 꽤나 청교도적인 생활을 했답니다ㅋ 그렇다고 범생은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이었죠ㅎ

영웅문 역할놀이 ㅋㅋㅋㅋ 장정 8명의 역할놀이라니 웬지 귀여우면서도 상상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누군 신문 읽는다고 혼나고 소설 읽는다고 혼나고 또 몰래 계속 보고 그 땐 몰았는데 생각하니 참 ㅋㅋ 이상한 일이네요.

역시 선생님들도 야자 당직이 싫었을 것 같아요.ㅎㅎ

그 시절엔 그렇게 놀았죠ㅋ 그런 거 안하면 농구하고.
자율학습인데 뭘하며 시간을 보낼지도 자율적이지 않았지요ㅎㅎ 억압된 시간속에서도 그에 걸맞는 추억은 또 쌓이는 걸 보면 재미난 인생이죠.
야자 당번 선생님들은 밤늦도록 우릴 보시는게 지긋지긋 하셨을듯요ㅋ

한손으로 네모 그리고, 다른 손으로 동그라미 그리기 미친듯이 했었죠. ㅋㅋㅋㅋㅋㅋ 노벨문학상 심사관 작자들이 영웅문을 읽었으면 김용 작가한테 노벨상 줬을듯. 그야말로 마약이죠. ㅋㅋㅋㅋㅋㅋ

오호 신기하네요! 저도 쌍수호박권의 자질이 있는지 알아보고, 네모 세모 그리기 연습까지 했죠ㅋㅋ 역시 이 책을 읽은 이들은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군요. 이 방대한 서사와 스케일, 수많은 캐릭터의 개성들, 빠져드는 이야기 전개. 노벨상이 아깝지 않습니다ㅎㅎ

드디어 무공의 오의를 얻었다면서 열라 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냥 미친어린이의 정신나간 짓 ㅋㅋ 엄마는 제가 연습하는거 보고 무슨 생각했을지 ㅋㅋ

ㅋㅋ 책을 읽고 직접 적용해보는 건 바람직한 독서법이죠ㅎㅎ

남자들에게 무협이란 어떤 의미인가요?ㅋㅋ
웹소설 장르에서도 남자들 팬심이 어마어마하더라구요.

남자들에게 무협은, 한 번쯤 이루고 싶지만 닿지 않는 것에 대한 대리 만족이랄까요ㅎ 뛰어난 무술로 악당을 물리치고 영웅으로 칭송받는 상상을 안해본 남자들은 없을 듯요ㅋ

그런의미이군요! 닿을 수 없지만 꼭 한 번 되어보고 싶은!ㅋㅋ

책보단 영상으로 많이 접한것들이네요 ^^ 어릴적 중국드라마에 빠져서 위에 언급된 것들을 드라마나 영화로 다 본것 같아요. ㅎㅎ 리메이크되면 또보고 그랬었는데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ㅎㅎ

오. 라나님이 무협 드라마에 빠졌었다니 아주 의외인데요?ㅎㅎ 무협 드라마도 아주 중독성 있다는 얘길 듣긴 했어요. 어릴적 동네 비디오가게에 수십편씩 꽂혀있던 기억도 나네요ㅋ

저는 김용도 지금의 무협지도 딱히 관심이 없지만, 김용에서 나온 용어들이 지금도 쓰이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무협지를 통째로 만든 사람이구나. 말하자면 임요환이나 Nujabes와 같은 사람이구나 감탄했습니다. 어떤 작가분 블로그에서는 김용 무협지들도 시간이 지나면 세계문학전집에 오를 것이라는 말도 보았습니다.

수많은 무협지가 있지만, 김용의 무협지가 다른 작품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고, 그의 작품이 아직도 드라마화되고 회자되는 걸 보면 '고전'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네요.
역사와 대륙의 방대한 스케일을 아우르는 솜씨를 보면 어느 작가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영웅문 시리즈 저도 애정합니다. 3부 모두 다 3번 이상은 정독했어요. 얼마나 푹 빠져 있었던지..
전 중학교 1학년 때 읽었었기 때문에 집에서 편하게 배깔고 누워서 봤어요. ㅎㅎㅎ

와 브리님도 열혈 독자시군요!!ㅎㅎ
중학교때 접하셨다니,, 역시 독서가 브리님은 다르시군요. 무협지 조기 졸업ㅋ
방안에 책을 쌓아놓고 손에 침을 묻혀가며 읽으시는 중학생 브리님을 떠올려봅니다ㅋ

진짜 선생님들이 가장 탈출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네요^^
의천도룡기는 형이 비디로로 빌려보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하지요.
저도 어린 시절 비디오 빌려보던 재미로 살았던 거 같아요ㅋ

ㅋㅋㅋ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