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아[自我, Self, Ich, Moi :자신, 자아정체, 현상적 자아]에 대한 출발점이자, 시발점은, 서양철학에서,
델포이(Delphoe) 아폴론 신전에 적힌, Socrates가 자주 인용했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다.
그 이후 Platon과 Aristoteles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철학자들이 존재의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2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아는 제쳐두고,
.Descartes의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처럼,
자아 개념을 인지적(認知的)인 사유(思惟)주체로 통찰한다.
3.
Kant의 '자아[自我,Ich]'는, 라이프니츠에게서 유래한, '통각(統覺:Apperzeption)'이며,
이 통각은 모든 경험(감각, 사고, 행동 등)이나 인식을 자기의 의식 속에서 종합하고 통일하는 작용을 한다.
통각은 또한 ‘내부 감각’의 준말인 내감 (內感)과 상통한다.
'순수 통각=근원적 통각'은 다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도출되지 않는 통각이며,선험적 자아(직관적 자아)가 이끄는 "나는 생각한다 (Ich denke)의 통각기능이다.
'초월론적 통각'은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 '하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능력이자,
지각(知覺)에 따라서 의식에 나타나는 외계 대상의 다양한 표상(表象) 가운데 '하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적극적인 기능의 통각이다.
4.
프로이트의 자아(ego)는
리비도(libido)의 저장고인 원초아(id:원시적이고 조직되지 않은 본능과 충동의 원천)와
이상적이고 정신적인 초자아(超自我superego상위자아: 자아를 감시하는 무의식적 양심)사이에서,
양자의 의존과 갈등을 심리적으로 조정하고 통일하는 중재 역할을 하며,
야수같은 충동들이 적당히 만족하도록 현실과 경험에 근거한 판단과 조정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의 자아는 외적인 존재와 마음 속 존재를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
5.
Rogers의 자아는,
개인이 (자신의) 유기체를 유지-실현-향상시키기 위한 하나의 기본 동기이자,
나 혹은 나의 관계성에 대한 지각과 가치관들로 이뤄진, 일관성 있는 개념체계이다.
6.
Sartre의 자아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에서 비롯되고 존재해왔던 , 칸트의 선험적 자아 개념를 부정한다.
시르트르는,
"자아란,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연속된 변천 과정이므로, 하나로 규정 될 수 없다."고 말한다.
7.
Sullivan의 자아는, 모든 불안(감)을 처리하는 일련의 기법으로서의 자아시스템이다.
Adler의 자아는, 적극적 고양을 추구하는 특징적인 생활양식을 수반한, 고도로 인격화된 주관적 시스템이다.
8.
행동주의자의 자아는, 행동할 때 인식대상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일종의 신비적인 영혼체계이다.
9.
성격심리학의 자아는 구체적인 동기유발(動機誘發)의 근원이나 목표로서의 자아몰입(自我沒入, ego-involvement)이다. 이러한 자아는 주어진 환경에 대처하고자 나의 행동이나 경험을 조직하여 나로 하여금 적응하도록 하는 기능이자, 그에 따른 나의 행위·태도·정서 등의 경향이다.
10.
결론: 나름대로 종합해보건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내가 ‘나’라고 느끼는, 또는 ‘나답다’라고 생각하는, 인격의 동일성(同一性, identity) 또는 연속성(連續性, continuity)을 지속적으로 의식할 때, 그러한 의식을 하고 있는 주체가 곧 자아(自我, Self, Ich, Moi :자신)이다.
이렇게 말은 뻔드르르하게 내뱉었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내가 누구인지 나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남들이 나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 내 안 자체가 소우주이며 미지의 세계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한 인간의 표상에 나타난 단면에 대한 고찰로써, 그저 평면사진 한 장 찍어서 주관적인 느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이 인간을 아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 아니 평생 동안 모를 수도 있다. ( 일부의 대한민국 국민이 오판했던 부패의 이데아로서의 '이명박'이라는 인물의 가식과 위선적인 행태를 보라!) 이렇듯이 인간 속에서 인간은 매순간 변해간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할 것이 있지만 ,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겐 관성이 들어 먹히는 개성과, 가치관과, 세계관과 그에 따른 실천윤리가 필요한 모양이다.
좌우지간 그래도 ‘이게 바로 나’라고 우기면서, 또는 착각하면서, 어제보단 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면서!
오늘도 굿 럭 !
내가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주관적 인식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것 같아요. 가즈앗!!! ㅋ
오늘은 미세먼지 지천으로 휘날리는데, 크게 벌린 입 다무셔야 할 듯! ㅋㅋㅋ
유행하는 말이 있잖습니까! 길거리에서 묻는 “도를 아십니까?” 바로 이 말!
나를 알기 위해 욕정에 몸부림치며 금욕하고 수련하고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배워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 나의 정체성! ......
그렇게 헤매는 과정에서 이렇든 저렇든 모종의 흔적이 남으니,
타인들은 그 흔적을 보고 소위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아무튼 사유하시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튜터조님께 굿 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