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열전 3 - 절망의 땅에 희망을 연 의사 조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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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네바 세계의사총회에서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의 선언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 제정한 선서의 앞머리에는 이런 결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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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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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직종에서나 직업윤리를 잊는 이들은 있는 법이니, 그런 자들을 예외로 친다면 의사는 어쩌면 그 직을 갖는 자체로 인류에 봉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항상 병들어 고통받았고 의사는 그들을 위해 있었으니까. 아무리 무섭고 끔찍한 병마가 닥쳐도 이에 맞서는 의사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존재했다. 거칠고 강퍅했던 우리 현대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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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이라는 병이 있어. 우리말로 하면 나병.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흉측한 증상 때문에, 또 약이나 제대로 된 치료법도 없었기에 불운한 환자들은 어느 문명권에서나 불가촉천민 혹은 하늘에 죄를 지은 사람 취급을 받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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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제는 한센병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고 보고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물 잘 나고 기후 좋고 육지와도 가까운” 전남 고흥의 소록도였지. 소록도 서쪽 일부에 병원 부지가 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주민들로부터 토지 ‘매입’에 나섰고 협박과 회유에 못 이긴 사람들이 쫓겨난 터에 1916년 2월24일 소록도 자혜의원이 문을 열었어. 조선총독부령 7호, 조선 땅에 세워진 19번째 자혜의원(대한제국의 빈민구호 의료기관이었는데 조선총독부가 그 이름을 계속 썼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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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한센인들의 피어린 역사를 글 몇 줄로 압축하기란 쉽지 않구나. 단적인 예로 단종수술의 비극을 얘기해줄게.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야.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에 물든 우생학이 풍미하던 시절, 일본인들은 나환자들에게 부부 동거를 허용하되 강제 단종수술, 즉 불임수술을 받도록 했어. 심지어 결혼 목적이 아닌 징벌 목적으로도 사용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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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원장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단종수술대에 오른 한센인
이동이라는 이의 시는 자못 눈물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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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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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난을 겪은 한센인들의 응어리가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구나. 해방이 오고 일제의 자혜의원이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바뀌었지만 그 한(恨)덩이는 커지면 커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지. 그러던 중 1961년 군의관 한 명이 국립소록도병원장으로 부임해. 조창원 대령(1926~2018)이라는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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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당시 홍천 제2 야전병원장이었던 그는 휘하 장병들에게 지지 연설을 하면서 쿠데타 주역들의 주목을 받는단다. 재야 인사 장준하도 5·16 쿠데타 직후에는 지지한 적이 있었던 만큼,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이 퍼져 있었고 조창원도 그런 뜻에서 지지를 표한 정도였지. 하지만 쿠데타 주역들은 함께 일하자며 그를 꼬였어. “그래서 일을 분담하자고 제의했죠. 당신들은 정치를 하고 나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힘을 쏟기로 하자고 했더니 반대를 않더군요.(〈한겨레신문〉 1993년 10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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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소록도병원 원장으로 부임한 조창원 대령은 그곳에서 진짜 ‘혁명’을 일으켰어.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마치 휴전선처럼 환자들과 직원들의 숙소를 갈라놓은 철조망을 없애는 작업이었어. 섬에 왔을 때 본 첫 풍경이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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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나 다름없는 몰골의 나환자가 일반인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어 알아보니 일반인용 배와 나환자용 배가 따로 있다잖아. 게다가 그 환자는 원장의 눈에 띈 자체가 죄를 지은 양 벌벌 떨며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겠어?(〈한겨레신문〉 1998년 4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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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원 원장은 섬 곳곳에 대문짝만한 표어들을 갖다 붙였어. “나병은 낫는다.” “나병은 유전되지 않는다.” 뒤이어 그는 일제강점기 나환자들의 한 맺힌 노동으로 지어진 벽돌 공장을 폭파하고 역시 한센인들의 피눈물이 아롱진 단종수술을 폐지해버렸어.또 나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방편으로 병원 직원과 나환자들의 연합 축구팀을 만들어 맹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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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떨어져 나가 축구화 코에 솜을 틀어막고 뛰었던 소록도 축구단은 고흥 군민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룩했지. 이에 고무된 조창원 원장은 소록도 팀을 도내 축구선수권대회에 고흥군 대표로 출전시켰어. 그때 소록도 팀의 마크는 “빨간 유니폼에 손가락이 몇 개 잘린 그런 깜장 마크(〈사상계〉 1966년 10월호, 이규태, <소록도의 반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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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 입은 의사이자 국립소록도병원 원장인 조창원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선수들을 응원했어.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은 축구선수란 말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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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적으로 무리가 있던 소록도 팀의 후보 선수가 죄다 쓰러지자 급기야 조창원 원장은 직접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뛰어들었어. 처음에는 비웃음을 날리던 관중이 눈물을 흘리며 빨간색 유니폼을 응원했고, 한센인 선수들은 몸소 뛰어든 원장에게 뒤질세라 가슴이 찢어지도록 뛰었지. 경기가 끝난 뒤 조창원 원장은 이렇게 연설했어. “문둥이도 축구 같은 걸 할 수 있구나 하는 조그마한 사연들이 수만 나환자에게 벅차고 갈피 잡을 수 없는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에 일어난 그 벅찬 일들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가 없을 겁니다. 나는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윗글 중, 이청준 <우리들의 천국>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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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조창원 원장은 소록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새로이 열고자 대규모 간척사업을 전개하지만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한 지역민들의 반대와 정치적 모함까지 겹치면서 다른 곳으로 전보됐어. 몇 년 뒤 조창원 원장은 끝내 소록도로 돌아와 간척사업을 마무리해서 소록도 사람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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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그는 또 다른 ‘막장’의 땅, 강원도 탄광촌을 찾아 석탄가루가 폐에 쌓여 죽어가는 진폐증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게 돼. “근로복지공사 산하 태백시 장성병원 원장(규폐센터 소장)을 맡아 환자들과 병실에서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고 꺼져가는 생명들에게 ‘당신 곁에 내가 있고 나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일요일·공휴일도 마다 않고 환자를 돌보는 ‘무휴제’를 스스로에게 선언했다(〈중앙일보〉 1992년 1월24일).” 이렇게 하고 보니 그가 재직하던 병원이 전국 제일의 ‘진폐증 전문병원’이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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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그는 이런 ‘넋두리’를 했어. “1980년 소록도병원장을 마치고 장성병원 원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이삿짐을 싸고 있을 때 아내가 ‘실력이 없으니 그런 골짜기로만 다니는 것 아니냐’며 ‘나이롱 의사’라고 원망 섞어 부르더군요. …난 치료 기술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진짜 나이롱이에요. 10명 중 9명은 치료해야 되는데 난 그동안 10명 중 9명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조선일보〉 1998년 2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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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조창원은 평생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에 도전하며 살았어. 그는 병을 고치지는 못했는지 모르지만 병자들의 삶을 고쳤고, 희망을 주었고, 좌절의 철조망을 끊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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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사람의 몸만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야. 환자의 병든 마음도 치료하는 게 의사 ‘선생님’들이야. ‘문둥이’들의 축구 경기가 열리던 날, 한센인들에게 간척사업으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열변을 토하던 순간, 진폐증 환자들을 부여잡고 하루도 쉬지 않고 씨름하던 그 시간들을 돌아보건대 조창원 원장만큼 진정한 의술을 베푼 사람이 우리 역사, 아니 세계사에서 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빠는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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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중인 조창원 원장.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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