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상태(인간의 조건)] 1부 3장. 영원함 vs 죽지않음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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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원함 vs 죽지않음Eternity versus Immortality

소크라테스학파 안에서 정치적인 생각들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이 세계의 거시기들 안으로의 행동적인 참여(행동의 사람들), 다른한편으로는, 관조 안에서 완숙해지는 순수한 생각(생각의 사람들), 이 두가지 방식이 다른 길들을 가기 시작했다(85)That the various modes of active engagement in the things of this world, on one side, and pure thought culminating in contemplation, on the other, might correspond to two altogether different central human concerns has in one way or another been manifest ever since "the men of thought and the men of action began to take different paths," that is, since the rise of political thought in the Socratic school.

이것이 죽어야함이다: 가즌거시기들이 순환하는 질서명령 안에서 움직이는 우주 안에서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87)This is mortality: to move along a rectilinear line in a universe where everything, if it moves at all, moves in a cyclical order.

죽어야만하는것들의 과제로써의, 그리고 잠재적인 위대함으로써의, 죽지않음은 거시기들을 생산하는 그들의 할힘, 곧 작업들, 행함들 그리고 낱말들, 안에 놓여있다... 인디비두얼로써는 죽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죽지않는 행함의 역량에 의해서 그리고 사라지지않을 자취들을 뒤에 남김에 의해서, 사람은 죽지않음을 획득하고, 그들 자신이 신적인 본성자연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자신을 항상 최고의 존재로써 증명하는 최고인자(아리스토이)만이 실재현실적으로 인간이다. 타자들 곧 본성자연이 그들에게 내어준 즐거움에만 동의하는 자들은 동물들처럼 살다가 죽는다(88)The task and potential greatness of mortals lie in their ability to produce things— works and deeds and words원주19— which would deserve to be and, at least to a degree, are at home in everlastingness, so that through them mortals could find their place in a cosmos where everything is immortal except themselves. By their capacity for the immortal deed, by their ability to leave nonperishable traces behind, men, their individual mortality notwithstanding, attain an immortality of their own and prove themselves to be of a "divine" nature. The distinction between man and animal runs right through the human species itself: only the best(aristoi), who constantly prove themselves to be the best(aristeuein, a verb for which there is no equivalent in any other language) and who "prefer immortal fame to mortal things," are really human; the others, content with whatever pleasures nature will yield them, live and die like animals. This was still the opinion of Heraclitus, an opinion whose equivalent one will find in hardly any philosopher after Socrates.

원주18. 본성자연은 (사람)종에게는 주기를 통해서 그들이 영원히 있도록 보증하지만, 인디비두얼에게는 그러한 영원히 있음을 보증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거시기들에게 있어서, 생명삶이 있음이다"(87)See Ps. Aristotle Economics 1343b24: Nature guarantees to the species their being forever through recurrence(periodos), but cannot guarantee such being forever to the individual. The same thought, "For living things, life is being," appears in On the Soul 415bl3.

원주19. 그리스어에서는 "작업들"과 "행함들" 사이의 구별이 없다, 둘다 모두 에르가라고 불렀다... 철학자들, 오히려 소피스트들이, 만들기(포이에인)와 행동하기(프라테인) 사이를 구별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포이에마타(생산물)과 프라그마타(실용물)이라는 명사꼴들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호머는 프라그마타라는 낱말을 알지도 못했고, 플라톤 역시 이 낱말을 "인간의 일들"이라고 여겼고, 이들 낱말들은 말썽과 쓸데없음의 내포로써 렌더링된다. 헤로도투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87)The Greek language does not distinguish between "works" and "deeds," but calls both erga if they are durable enough to last and great enough to be remembered. It is only when the philosophers, or rather the Sophists, began to draw their "endless distinctions" and to distinguish between making and acting(poiein and prattein) that the nouns poiemata and pragmata received wider currency(see Plato's Charmides 163). Homer does not yet know the word pragmata, which in Plato(ta ton anthropon pragmata) is best rendered by "human affairs" and has the connotations of trouble and futility. In Herodotus pragmata can have the same connotation(cf., for instance, i. 155).

테오리아 또는 "관조"는 영원한것의 경험에 주어진 낱말이다... 영원함의 발견은 죽지않음의 추구조차도 한낱 헛된 것으로 경멸케 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영원함을 불러일으키는 고대도시국가와 종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립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그리스도교적 복음의 일어섬은 지상에서의 죽지않음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을 쓸데없는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비타 악티바 및 바이오스 폴리티코스는 관조의 하녀가 되었다. 심지어 근대적인 세속화의 일어남 및 전통적인 위계서열의 뒤집음조차도 기원적으로 비타 악티바의 샘물이자 중심이었던 죽지않음을 향한 추구를 잊혀짐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90)Theoria, or "contemplation," is the word given to the experience of the eternal, as distinguished from all other attitudes, which at most may pertain to immortality. It may be that the philosophers' discovery of the eternal was helped by their very justified doubt of the chances of the polis for immortality or even permanence, and it may be that the shock of this discovery was so overwhelming that they could not but look down upon all striving for immortality as vanity and vainglory, certainly placing themselves thereby into open opposition to the ancient city-state and the religion which inspired it. However, the eventual victory of the concern with eternity over all kinds of aspirations toward immortality is not due to philosophic thought.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plainly demonstrated that no work of mortal hands can be immortal, and it was accompanied by the rise of the Christian gospel of an everlasting individual life to its position as the exclusive religion of Western mankind. Both together made any striving for an earthly immortality futile and unnecessary. And they succeeded so well in making the vita activa and the bios politikos the handmaidens of contemplation that not even the rise of the secular in the modern age and the concomitant reversal of the traditional hierarchy between action and contemplation sufficed to save from oblivion the striving for immortality which originally had been the spring and center of the vita activa.

● 일단 총 6부 가운데 1부를 올립니다. 한나 아렌트는 정말이지 대단한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그렇냐면, 학술적 역량이 A급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연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그의 통찰의 대단함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통찰력이 강하고 깊고 큽니다. 지난번 (52)회차 아렌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도 그의 통찰의 깊이에 놀랐지만, 그것은 맛배기 정도였고, 이번 [인간조건상태(인간의 조건)]은 실전적으로 실감나게 해줍니다. 왜 다들 아렌트, 아렌트 하는지, 알겠습니다. 역시 A급들, 특히 아렌트 정도등급의 2차 교양원천들은 바로 1차 교양원천의 수준으로 등급상승됩니다. 그 까닭이 바로 통찰의 진정성F에 있습니다. 투명하고 깊은 통찰의 진정성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아렌트가 엄청난 윤리적인 내면공간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그냥 지식이 뛰어나다고, 훌륭하다고, 모르는 것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하다고, 1차 교양식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강력하고 투명한 윤리적인 가치지향 이모션으로 충만한 작업만이 1차 교양식품이 됩니다. 놀라운 통찰력을 접하면,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에게 말했듯이,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로 맞은 듯이 영혼이 번쩍 깨어납니다" "거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생전 보지못했떤 먼 풍경을 보게 됩니다" 진정성의 힘, 제대로 생각하려는 저 극진하고 간절한 노력, 심연의 맨얼굴을 응시하는 무서운 맞대면의 정념이라는 것, 지난회차 키에르케고르의 발언을 한번 더 퍼옵니다. "예외는 일반적인것들을 설명하고 자기자신도 설명한다. 그리고 만약 일반적인것들을 올바르게 연구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참다운 예외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가즌거시기들은 일반적인것들 속에서가 아니라 예외 속에서 백일 하에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것들을 놓고, 끝없이 떠들어 대면 지루해진다: 거기에 예외들이 있다. 이 예외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일반적인것들 또한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정념없이 그저 편안한 피상적임을 갖고 일반적인것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이 어려움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예외는 이에 반해 일반적인것들을 뜨거운 정념으로 생각한다."(27~28) 일상인으로써 일상성에 찌들어서, 우리가 외면하거나, 비정상적인것들로 회피해온 것들, 예외적인것들, 비정상적인것들, 제대로 된것들,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것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멀리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곤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너무 에너지소모가 크고, 우리에게 올 오어 낫씽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우리가 특별히 게을러서도 아니고, 특별히 못나서도 아니고, 특별히 모자라서도 아니라, 진정성, 예외, 본질적인것들, 물자체, 본질이란 것이 원래 비정상적으로 우리의 생명에너지를 많이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정성을 지닐수록, 더욱 에너제틱해지고, 없었던 모잘랐던 에너지마저도 새롭게 증강되고, 샘솟는 바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꾸준한 운동중독을 경험해본 사람들, 마라톤의 런너스 하이를 경험해본 사람들, 깔딱고개를 넘어서 본 사람들, 사즉생의 깊은 뜻을 맛본 사람들은, 극한의 고통을 넘어서는, 진정성의 희열, 평온, 해방감, 니르바나, 해탈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독이고, 예외이고, 비정상입니다. 전념, 진정성, 몰입, 심연으로의 짖쳐들어가기가 정답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안, 고독, 상처, 파괴, 해체를 동반합니다. 아렌트의 통찰은 이러한 경험을 우리에게 대리체험하도록 해줍니다. 대리체험이라는 점, 그가 대신 그러한 위험을 감수했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덜 피곤하는 것, 이러한 점에서 안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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